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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
hyun Jin
玄辰
Jisim

1983 제주도 출생
2003 제주도 출도 홍익대학교 회화과 입학
2008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2012 독일로 출국
2015 독일 Bauhaus Universitaet Freie Kunst 설치미술 합격
2016 제주도 입도

 

2016 ‘오래된 미래’전 제주도 황지식당
2017 제주도 문화예술재단 창작공간 이층 레지던시 참여
2017 창작공간 이층 오픈 스튜디오 카페 HAPPEN 전시
2018 예술공간 이아 기획전 일상-상상

‘있음’과 ‘없음’의 애틋한 간극
김지혜(미학)

 

사라진 자(혹은 것)들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는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기억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며, 어떤 이에게는 애틋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유령처럼 실체가 없으며, 우리와 실제로 마주할 수 없다. 그리고 남은 자에게 사라진 자(혹은 것)들은 한없이 아름답거나 한없이 괴팍하게 변질되곤 한다. 그래야 그들을 떠나보낸 남은 자는 새로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진은 이렇듯 실체 없는 그것들을 어떤 시간, 어떤 장소로 가져다 놓는 작가이다. 작업의 의도와 목적이 지극히 현실적인 어떤 것(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 엮여 있으며, 매체 활용과 작업 방식이 작품의 내용과 비교적 명확하게 연결되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기는 일은 상상과 재배치의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 차례에 걸쳐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나는 PC 앞에 앉기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였으며, 어딘가 살짝 베인 듯 나쁘지만은 않은 미묘한 동통에 시달렸다. 마치 그녀의 초기 설치 작품, 유리를 깨어 만든 작품이 생각의 여리고 나약한 부분에 닿은 듯 말이다. 치열하고 깊이 있는 고민을 하며, 페인팅에서 오브제와 사진을 이용한 설치작업, 사진을 거쳐 다시 페인팅으로 돌아와 매체의 범위를 확장하며 작업하는 그녀처럼, 오롯이 홀로 고민하고 아파하며, 사라진 것들을 나지막이 애도하는 작가를 본 것은 몇 해만인가.

 

나의 역할은 작가 현진의 작업을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므로, 최대한 이를 가독성 있고, 소통 가능한 것으로 풀어내야 할 것이다. 고로 작가에게 다소 무례하고 미안한 마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쓰려 한다. 내가 그녀의 작업을 바라보며 주목하게 된 것은 세 가지 지점이다. 첫째, 상징계의 질서를 깨뜨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없는 것’을 바라보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 둘째, 겉으로 표상되지 않는 것들(이를 테면 그림자 같은 것들)이 지니는 실존적 가치, 셋째, 사라진 것들을 그 장소와 그 시간으로 소환하려는 작가의 영매로서의 역할이 그것이다.

 

우선, 첫 번째 지점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현진은 대학교 3학년 때 회화에 유리에 비친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솜씨가 좋았던 그로서는 하이퍼리얼리스틱한(극사실적인) 작업을 하는 여타의 화가들처럼 유리에 관심을 두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진은 유리가 단순히 반사된 이미지를 왜곡하여 재현하는 것보다는 그 속에 숨겨진 허상에 집중하였다. 즉 상징계의 질서에서 벗어난, 즉 누군가의 자녀이거나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거나 생의 질서로 가득 찬 한 복판에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 ‘없음’으로써의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반사’하고, ‘반영’하고, ‘투영’하는 ‘유리’라는 ‘실제 소재’로 향했고, 유리는 그 두께 가운데 빈 공간을 보여주는 오브제로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판 유리가 겹쳐진 형태로 등장하기도 하고, 날카롭게 깨어져 무엇이라도 베어낼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위태로운 유리들은 유학생으로 머물던 독일의 작은 방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한껏 부풀었던 욕망이 유리처럼 차갑게 스러지듯.

 

이처럼 ‘실제 유리’로 나타나게 된 소재는 그와 더불어 그림자를 머금기 시작한다. 이게 두 번째로 말하고자 하는 ‘겉으로 표상되지 않는 것들이 지니는 실존적 가치’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녀의 작업에는 유리로 나누어진 공간과 더불어 실제 형상이 빛을 투사하게 되면서 남기는 그림자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이는 제주에서 작업한 회화(15.11.2017. 33.2648618, 126.30226470000002; 이 제목은 할아버지가 생전에 가꾸시던 감귤농장의 위도와 경도이자, 그곳에서 작업했던 날짜를 의미한다.)에서 명증하게 드러나는데, 물을 담은 갖가지 유리병과 유리잔 들이 때때로 변하는 빛과 만나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캔버스 위에 남기는 작업이 그러하다. 그 그림자들은 한 장소(하나의 캔버스) 안에 공존하지만,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속 꽃들처럼,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것들이다. 그래서일까? 그 그림자에는 네덜란드 정물화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허망함, 처연함과 더불어 부질없는 생에 대한 애틋함이 남아있다. 작가는 독일에서 했던 여러 작업에서 뾰족하게 날이 선 유리조각들로 그 동안 그림을 그려왔던 평면 종이들을 찌르고 나눈 뒤 그 위에 사람들의 형상을 종이와 그림자로 남겨둔 바 있다. 현진의 말대로, ‘있음’과 ‘없음’이 함께하는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는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 현재는 현실의 존재가 아닌 – 할아버지와 유년기에 찍었던 사진에서 할아버지의 형상을 도려내고 형태 없는 공기로 채워 넣는 작업과도 연결되며, 사람 하나 없는 이호해수욕장의 헛헛한 장면을 담은 사진을 유리로 된 수조에 넣어 녹여내는 작업과도 연결된다. 거기에는 실제 존재들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머물렀던 시간이 소생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시간을 곱씹게 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없음’이 ‘있음’과 공존하는 것. 아마도 역사 속 여러 예술가들은 그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데 집중해왔을지도 모르겠다. 현진은 내가 세 번째로 집중한 것처럼, 그 수많은 없는 존재들을 현재 여기에 있는 우리들과 공존하도록 하는 역할, 즉 영매로서의 역할을 한다. 물론 그것은 망자이거나 실체 없는 많은 것들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어김없이 우리도 소속된다. 아마도 이 지점이 중요한 것은 첫 번째로 이야기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사실 어떠한 ‘이름’과 ‘정체성’이 없이는 ‘의미 없는 존재’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림을 그렸던 그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기여를 하고,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왔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로 평면을 날카롭게 찢고 뚫어, 실제 세상과 마주하기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그 어떤 이름도, 그 어떤 의미도 부질없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현진의 작업과 마주하며, 깊은 고통을 느꼈던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그 어떤 실제적인 작업을 하는 이들보다 그를 응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과 반성의 과정을 거치며, 아프락사스처럼 그녀가 세상을 깨고 나와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작가의 말대로, 무한한 아름다움과 더불어 무한한 처연함을 지닌 제주에서, 새롭고 강렬한 에너지를 지닌 작업을 지속하게 되길 바란다. ‘15.11.2017. 33.2648618, 126.30226470000002’는 그 시작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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