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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
LEE HO-CHUL
李鎬哲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도예과 졸업
제주대학교 문화조형 디자인과 졸업

Solo Exihibition
2017 쌍생-Double Plot , 꿈인제주 ,제주도
2016 돌을 움킨 사람들 , Gallery DOS , 서울

Group Exhibition
2017 Residency – World of CO , Sofia , Bulgaria
2017 여수 국제아트 페스티벌 , 여수 세계 박람회장, 여수
2017 Art-Cube , 서귀포 – 치유의 숲 , 제주

상상이 빚는 차가운 손_천재가 사는 실패의 시간

 

이나연_미술평론가

 

반짝이는 임기응변과 재치, 시대를 읽는 눈이 현대미술가를 만든다. 타협을 모르는 집요함과 인내심에 시간들여 익힌 기함할 테크닉이 결합돼 장인을 만든다. 이호철은 그래서 동시대미술가보다는 장인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 있다. 이제 첫 개인전을 치르는, 앞날 유망한 젊은 작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아니냐고 되물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라는 존재를 과감히 떼어내고 작품만 보자. 정성들인 시간이 함축된, 잘 다듬어진 기술이 들어간, 실존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 더해진 작품 말이다. 누가 이 묵직한 작품 앞에서 작가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이불문, 현대미술은 가벼워진지 오래다. 뒤샹이 예술은 아름다울 필요가 없고 개념이 더욱 중요하다며 미술의 체제를 전복한 이래, 현대미술가들은 모두 뒤샹의 후예가 되길 자처했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후예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시대를 잘 만났다면 천재라 불리웠을, 기막힌 손기술을 가진 화가와 조각가들은 모두다 어디로 간걸까? 동시대미술계를 당황스레 바라보며, 구시대적이라 논해질까 걱정스런 마음으로 문 밖에서 노크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걸까. 이호철의 작품들은 공예와 조각, 현시대와 구시대의 경계쯤에서 적합한 때를 기다리는 듯하다. 장인의 마음으로 공들여 작품을 다듬으면서 시대를 견뎌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심장에서 작업까지

 

이호철의 작업실엔 팔 다리가 굴러다닌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 작업실에 들어가면 실제 신체토막으로 속아서 소리를 지를만큼 생생하게 묘사된 팔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힘줄 하나 근육 하나 정교하게 표현한 팔을 만들고 떠내고 굽고 채색하고 유약을 바른다. 바닷가에서 가져온듯한 현무암 덩어리도, 사실 그 무수한 구멍을 일일이 파내어 자연스러운 구멍인양 만들어 채색하고 유약을 바른 창작물이다. 게다가 작품들은 도예 기법으로 제작됐기 때문에 작업과정이 보통 조각보다 두 세 단계가 더 많다. 단순히 그리고, 깍고, 만들고의 문제가 아니라, 주형을 떠내고, 말리고, 불로 굽고, 색을 칠하며 유약을 바르는 과정에서 기술이 부족하면 작품에 불의의 사고가 생길수도 있는 복잡한 과정들을 통과한다.

 

로댕은 대리석 덩어리를 골라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깎아낼 뿐이라고 말했다. 미켈란젤로는 돌 안에 이미 들어있는 형상을 끄집어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불필요한 부분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일한 과거의 거장들과 달리, 이호철은 필요한 것들만 만든다.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라고 확정된 부분만을 제작해 조합한다. 당연하게도 불필요한 부분은 굳이 만들어져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작가가 명확히 의도한 형상만이 결과물이 된다. 랄프 왈도 애머슨은 “예술에서 심장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손은 없다”고 했다. 심장이 상상한 바를 고스란히 재현할 수 있는 손이 있다면, 심장에서 손까지 그다지 걸림없이 표현해낼 수 있는 빛나는 재능이 있다면, 애머슨의 말은 유효하지 않다. 심장이 상상할 수 있는 것만큼 대단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손은 ‘있는 것’ 같다.

 

존재와 삶, 그 무게와 깊이

 

<진흙 속에 핀 별>을 보자. 엄지와 검지가 작은 돌을 잡고 있고, 엄지와 검지와 중지엔 흙이 묻었다. 이 세 손가락의 손톱엔 수금이 발려져 있다. 작가가 재료로 사용하고 있는 흙과 돌은 현실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 현실의 재료들은 다시 별이라는 이상을 표현하는 보조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손이 잡고 있는 작은 현무암이 곧 별이다. 인간의 손에 잡히고 만 작은 별은 반짝이지도 귀해보이지도 않는, 울퉁불퉁 못생기고 초라한 동맹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별을 잡은 인간의 손이야말로 금칠을 할만큼 고귀해 보인다. 결국은 사람이 꾸는 꿈, 사람이 하는 일, 사람이 만든 세상, 사람이 빚은 작품. 작가는 그렇게 인간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실존과 삶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작가의 말을 빌면 “돌로 뒤덮히고 고립된 척박한 환경에서 투쟁하듯 살아온 제주도 사람들의 삶을 배경으로, 단순히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주체적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잉태한 채 살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과 ‘살당보믄 살아진다(살다보면 살아진다)’는 말로 표현되는 제주의 정신이 깃든 작품들이라는 말이다.

이호철이 취하는 독특한 형식 중에 돌탑처럼 형상들을 쌓아 올리기가 있다. 희망과 정성을 담아 돌의 균형을 맞춰가며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돌탑처럼, 작가는 개개의 조형물을 천천히 쌓아올려 위태로운 탑을 쌓았다. <시간의 무게>와 <탑>은 그 특징을 가장 선명히 보여주는 작품에 속한다. 희망을 담은 돌탑을 쌓는다는 건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고, 이는 다시 현실의 고통을 반증하게 된다. 돌이라는 소재에 현실의 무게와 삶의 고통이라는 상징을 넣은 작가는, 희망을 담은 돌탑의 이미지를 더해 이중적인 상징을 표현하려 했다. 작가는 말한다. “나에게 이상과 실존에 대한 탐구는 정신적인 자아의 생존 문제이다. 그러나 살다보니, 살아내다보니, 삶이, 인간이, 나 자신이 막연하게나마 느껴질 때가 있다. 문장이 될 수 없는 단어들로. 생존이 실존이 된다. 그리고 생존의 이면에는 이상이 존재한다. 나에게 현실과 이상은 하나다. 제아무리 무거운 돌멩이도 하늘을 향해 놓으면 탑이 된다. 작은 돌멩이 하나 올릴 수만 있다면.” 이호철이 탑을 쌓아가는 마음은 그리 귀한 것이다. 비록 “바람잦은 이곳(제주)에선 그마저 쉽지 않은 일이라 그 돌멩이 하나의 무게가 자꾸 손 안에서 미끄러지기 일쑤”이지만.

 

흙과 하는 고행

 

그 소중한 마음이 억울하진 않은지 묻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모든게 쉽고 빠르고 편해졌는데, 혼자만 왜 그리도 어렵게 천천히 불편하게 가야하는 건지. 남들이 다 내려놓은 것처럼 보이는 실존이나 이상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지속하돼, 고행같은 작업방법은 타협할 여지가 없는건지. 신작을 제작하면서도 굽거나 운반하는 과정에서 또 몇 점이나 깨지고 부서졌다는 작품에 대한 얘기는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그걸 만들어낸 손이, 그 파괴를 바라보는 마음을 오죽할까 싶었다. 그래서 다들 편하고 다루기 쉬운 재료들을 찾아 떠나버린 마당에, 굳이 그릇을 굽는 것도 아닌데 도예기법에 천착하는 이유가 못내 의문이었다. 작가는 재료를 다루는 과정에서부터 주제선택, 심지어 작업에 맞춘 생활방식에 이르기까지 내내 고행을 자처한다. 돌이나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진 뒤에 가마에서 고온의 불길을 견딘 후에야 견고한 빛깔을 드러내는 흙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행을 견딘 뒤에 단단한 작품이 되는 흙처럼, 작가도 이 고행이 시간이 지난 뒤에 훨씬 단단해질 것이라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의 신작들은 보란듯이 더욱 깊어지고 무거워졌다.

 

는 돌베개에 머리를 대고 몸을 뉘인 이를 묘사한다. 손과 다리, 머리가 위태롭게 허공을 가로지르듯이 놓인 탓에 잠을 자려는 이의 자세로는 영 불편해 보인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차가운 현실 속을 뜨거운 이상을 가지고 살기 위해 “현실을 베겟머리 삼아 필사적으로 누워있는” 모습이다. 현실을 상징하는 “차가운 베겟돌을 데우기 위해 한낮부터 뜨거운 꿈을 머리에 담는” 것이다. 낮과 밤, 현실과 꿈을 혼동할 만큼, 이상을 좇느라 골몰한 머리는 자면서도 ‘필사적’이어야 했을까. 그 쉼없는 존재에 대한 골몰이야말로 다시 작가의 레종 데트르가 되는 기묘한 순환은 존재하기 위해 존재에 대해 생각해야만 하는 단순한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물론 이 중요한 단순함은 간과되고 잊혀졌으며, 거의 사라졌다. 또 다른 신작 를 제작하며 이호철은 김훈의 문장을 참고했다. “삶은 풍화이며 견딤이며 또 늙음이다.” 손받침에 현무암이 올려져 있고, 헐거운 손가락 사이로 검은 모래를 흘린다. 쏟아져내린 검은 모래가 사람의 얼굴을 드러낸다. 자연이 사람의 손을 통과해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이 다시 모래가 되어 희미해지려 한다. 자연의 순환과 종교의 윤회 등으로 부지런히 사유가 확장될 조형물이다. 생각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일은 작품 앞에서 관객이 한참을 머무르게 하는 힘이다. 사색을 끌어내는 힘이 다시 돌이 마모돼 모래가 되는 시간만큼이나 작품이 존재가치를 가지는 이유가 된다.

 

비정형의 돌 두 개가 맞물리는 모습을 하얀 손이 받치면서 마치 돌들이 키스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 작품 도 지난 문법에서 많이 달라지진 않았다. 자연물과 인공물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위태로운 구도적 긴장감을 끌어낸다. 매끄러운 하얀 손이 울퉁불퉁한 검은 돌을 잡고 있는 대조감이 작품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서로 다른 공간과 생각 속에 사는 두 존재가 사랑으로 만나 부딪힌다는 것은 서로가 가진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는 일이라 여기며 빚은 작품이다. 브랑쿠시의 투박한 순수함과 로댕의 매끄러운 로맨틱함을 한데 모은 느낌이다. 언제나 한 명의 고뇌보다 둘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텅빈 어둠, 진짜의 실패

 

“그 안은, 시커멓게 비어 있었다… 결국, 그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건 누더기 같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의 컴컴한 공동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강

 

미켈란젤로는 어차피 실패할 거라면 성대하게 실패하는 게 낫다고 여겼다. 난 2016년에 현대미술의 언어를 읽어내는 자로서, 바로 지금의 컨템포러리아트씬에서 이호철의 작품이 반드시 실패하리라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필패를 각오한 그 부던한 노력을 말리고 싶진 않다. 되려 응원하고 격려하고 싶어진다. 묵직해 보이지만 무엇보다 깨지지 쉬운 도예기법의 조각은 사실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진짜로 보여주고 싶은 건 바로 그 속의 텅빔이 아닐까. 현대미술의 속성을 비꼬는 장치로 그 텅빔을 정치하고 정성스런 조각으로 포장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 텅빔을 개념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갑자기 동시대 언어로 풀어쓸 수 있는 이야기가 쏟아진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아직은 겉만 논하는 시간이고, 텅빈 어둠은 조악하더라도 어떻게든 현대미술의 언어로 표현되어져야 한다. 작가의 오래돼 보이는 사실적 조각품 속에, 그 속의 짙고 폐쇄적인 어둠 속에, 미술의 미래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한다. 그 비밀스런 대안이 언젠가 발견될 것이라 여기고, 작가의 고충이 어떻든 그의 실패의 시간이 좀더 길어져도 상관없겠다 싶다. 언젠가 진짜는 진짜로 드러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가짜가 가짜로 밝혀지는 것이 언제나 시간문제인 것처럼.

 

작가는 오히려 시대에 되묻고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 생존과 정신적인 실존이라는 경계에서 인체구상작업을 하는 내 작업이 그 주제나 표현이 진부하고 구시대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현대의 삶의 형식이 과거와 같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과거와 얼마만큼 달라지고 새로워졌는가. 여전히 과거와 역사는 현재 진행중이고 인간의 본질과 실존에 대한 화두 또한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오래되고 발전가능성이 없이 끝난다 하더라도. 그렇기에 나는 아직도 고뇌를 두려워하고 절망하면서도 고통스런 삶을 움켜잡고 동시에 이상을 꿈꾸고 삶의 가치와 존재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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